나태주 시인의 죽은 시인들의 나라-19

설야(雪夜)

김 광 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 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어려서, 고등학교 학생일 때였을 것이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고 무작정 시를 읽던 시절에 만난 시 가운데 한 편이다. 시인에 대한 그 어떤 사전지식조차 없었을 것이다. 다만 시 한 편이 가슴에 와 화살 되어 꽂혔다.

아! 이런 시도 있구나. 이런 것이 정말 시로구나. 그런 감격. 어찌 그 감격을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있었으랴. 시인에게는 다른 좋은 시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오로지 이 시만이 시인의 시였다. 시인의 전부였다. 시는 이렇게 일당백(一當百)의 능력이 있다.

우리는 우선 시인을 따라 눈 오는 밤으로 안내된다. 눈 오는 모습이며 눈 내리는 소리를 시인은 우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독자는 아득한 추억에 젖게 되고 시인이 이끄는 분위기에 압도된다.
그리하여 눈은 ‘처마 끝’ ‘호롱불’이 되기도 하고 ‘서글픈 옛 자취’도 된다. 이에 따라 시인은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려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듣는다.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니! 이 압권. 이 감격. 어느 세상 그 어떤 놀라운 시인의 눈과 귀가 있어 눈 오는 모습 앞에서 이런 발상과 표현을 감히 꺼낼 수 있었더란 말인가! 이거야말로 천기누설이다. 놀라워라, 놀라워라. 가슴이 절로 떨림을 느낀다.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눈은 이렇게 서늘한 겨울의 한 상징이지만 사람의 가슴에 들어와서는 뜨거운 입김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것이 시인의 힘이고 시의 덕성이다.

두고두고 우리를 깊은 밤 눈 내리는 뜨락으로 데리고 가서 밤 깊도록 서성이게도 하고, 먼 곳에 사는 그리운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듣게도 한다. 황홀한 착각에 빠지게도 만든다.

그 다음의 구절도 아름답고 찬란하기는 마찬가지다. 눈발은 독자를 과거로 데리고 가서 후회하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끝내는 ‘찬란한 ’ 마음의 의상을 입고 곱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람으로 귀결시킨다.

이렇게 눈을 느끼고, 밤을 느끼고, 옛날의 잃어버린 사랑을 간직하고, 인생을 곱게 쓸어안을 수 있는 사람, 그리하여 때늦은 후회까지도 미화할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을 험하게 살 까닭은 없다.

언제든 겨울이 오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면 그 어떤 시보다 먼저 떠오르는 시가 바로 김광균 시인의 이 작품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는 것으로도 바꿀 줄 아는 마력을 지닌 시. 오늘날 읽어서 약간의 예스런 말투가 있는데 이런 말투까지가 시의 분위기를 옛날의 그것으로 안내해준다.

굳이 오늘의 것으로 고쳐서 읽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올해도 춥고 을씨년스러운 겨울이 와 살아가가는 다소 불편하지만 이러한 시를 다시 읽을 수 있음을 감사하는 마음이다.

김광균(金光均, 1914~1993) 시인은 1930년대 김기림, 정지용 시인과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하던 모더니즘 시인이다.

김기림이 서구 모더니즘 이론을 이 땅에 소개했다면 ‘시는 하나의 회화(繪畵)다’ 라는 신념과 시 이론을 실천하고 시로서 육화한 사람이 바로 김광균 시인이다. 김광균 시인은 주로 그의 시에서 도시적 소재를 동원했으며 화려한 시각 이미지를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설야」가 당선되어 정식으로 데뷔했다. 시집으로 『와사등(瓦斯燈), 1939』,『기항지(寄港地), 1947』,『황혼가(黃昏歌), 1959』등을 출간했는데 6․25 때 사업을 하던 동생의 사망으로 시작을 중단하고 동생의 사업체를 맡아 경영했다.

장시간 사업가로 활동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임진화(壬辰花), 1989』란 시집을 출간했는데 이전의 시와는 전혀 다른 시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