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인의 죽은 시인들의 나라-6

오일도(吳一島, 1901~1946) 시인은 청록파의 조지훈 시인과 더불어 ‘내륙의 섬’이라고 말하면서 문향(文鄕)임을 자처하는 경북 영양이 자랑하는 시인입니다.

그것을 또한 지난 봄, 문학기행을 가서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외부인에게 오일도 시인은 그다지 많이 알려진 시인이 아닙니다. 시인의 생애도 짧거니와 작품의 수도 많지 않고 시인으로서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시인의 본명은 오희병(吳熙秉). 그러니까 일도는 아호인 셈인데 본명처럼 알려진 것입니다. 시인의 고향은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감천마을이라고들 부르고 있었습니다.

별로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남아있는 마을로 낙안오씨의 집성촌이라 했습니다.

오일도 시 공원을 비스듬히 넘어 등성이 길을 따라 감돌아 가니 마을의 중심부에 아주 잘 보존된 고택이 한 채 나오는데 그 집이 바로 오일도 시인의 생가라 했습니다.

비록 집주인이 그 집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생가만은 옛 모습 그대로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어 옛 시인의 모습을 다시 뵙는 듯 반가웠습니다.

아주 반듯하고 아름다운 보기 드문 기와집이었습니다. 일자형의 바깥채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넓은 마당이 나오고 사랑채가 있는데 마루 위에 걸려있는 현판에 쓰여 있는 글자가 ‘국운헌(菊雲軒)’. 국화가 구름처럼 피어있는 마루란 뜻인가? 국화꽃과 구름을 바라볼 수 있는 마루란 뜻인가?

이름부터가 별나고 아름다웠습니다. 가히 시인이 태어났을 법한 집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시인의 할아버지 오시동(吳時東) 옹. 천석군 부자였음이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부잣집 자제로 태어난 것입니다. 14세 때까지 향리에서 한문을 공부한 뒤, 15세에 한양 조 씨 필현(畢賢)과 혼인. 그 뒤,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22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했습니다.

귀국하여 중등학교 교사로 잠시 근무했고 고향의 맏형(熙台)로부터 사재를 얻어 1935년 한국 최초로 시 전문잡지인 <시원(詩苑)>을 창간, 5호까지 발행했습니다.

오일도 시인이 시 작품보다는 시 잡지 발간을 통한 한국시사의 공헌을 더 높이 쳐주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시인은 또 조지훈 시인의 형인 조동진(趙東振)의 유고시집 『세림시집』(1938)을 발간해준 사람으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5년 <조선문단> 4월호에 시가 발표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그 뒤에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생전에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결국 시인은 고향으로 돌아와 우울한 심정으로 폭음을 하다가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뜹니다. 그것도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45세의 나이로. 결코 오래 산 생애가 아닙니다.

오일도 시 공원은 최근에 만들어진 듯 꽉 들어찬 시비들이 모두가 새것이었습니다. 시비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시를 새긴 커다란 시비와 함께 시인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시인의 모습은 오늘날 보아도 매우 핸섬했습니다. 갸름한 얼굴과 매무새가 고운 미남형의 젊은이였습니다.

시인은 가도 그의 모습은 이렇게 젊은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음이 꼭 슬픔만은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시비에 새겨진 시보다는 시인의 동상을 부여안고 여러 장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나는 시 공원의 시비들을 돌면서 내가 아는 시 한편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소녀」란 이름의 시. 그러나 시 공원을 아무리 돌면서 찾아도 그 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쩐 일일까? 모두가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 뿐이었습니다. 시 공원을 만든 사람들이 일부러 오일도 시인의 작품을 그쪽으로만 몰아서 시비로 만들고 또 시인적 평가도 그쪽으로만 강조해서 그러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오일도 시인이라 하면 대뜸 떠오르는 시는 바로 「내 소녀」입니다.

이 시는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는 시로서 높이 평가되는 시입니다. 시의 스케일이 작아 보인다고요? 시 안에 담긴 내용이 또 빈약해 보인다고요? 글쎄요. 우리는 시라는 문학형식에다가 너무나 큰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시는 작은 형식의 글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용도 조그만 감흥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시한테 지나치게 많은 것, 커다란 목소리를 기대함 자체가 억지입니다.

잘 보존된 시인의 생가를 살피고 나서 감동했던 마음이 싹 가시는 마음이었습니다. 정말 있어야 할 유일한 한 편의 시가 거기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 5행의 시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한 행은 말줄임표인 점선으로만 처리했습니다. 매우 깔끔한 그리움과 사랑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전혀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시의 화자(퍼스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인 ‘소녀’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눈앞에 없습니다. 눈앞에 있는 건 ‘빈 가지에’ ‘걸어놓고’ 간 ‘바구니’입니다.

‘바구니’에서 시인은 ‘소녀’의 실체를 봅니다. 아닙니다. 비구니가 바로 소녀입니다. 이 얼마나 사랑스런 표현입니까?

그리고서 다음 연은 말줄임표인 점선뿐입니다. 묵언으로 말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얼마나 신선한 표현입니까?

이 시는 문자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부호로서도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한국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다음엔 1연의 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언뜻 1연의 이미지를 반복 표현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오늘도’ ‘薄紗의 아지랑이’가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탁월한 이미지 작업입니다.

‘박사(薄紗)’란 얇은 사, 즉 얇은 비단을 말합니다. 물론 여름이나 봄철 옷감으로 쓰였겠지요. 우리는 언뜻 이 대목에서 조지훈 시인의 「승무」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의 바로 그 구절 말입니다. 얘기가 여기까지 오면 조지훈 시인의 승무 앞부분은 오일도 시인의 「내 소녀」에서 많은 기법적인 암시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선배시인의 영향은 후배시인의 작품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면서 상생하는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비록 시인의 시 공원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내 소녀」란 시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 소녀/ 오일도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薄紗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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