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의 죽은 시인들 나라-4

내가 박목월 시인의 이름을 안 것은 중학교 2학년 겨울쯤 될 것입니다. 그해 가을, 하교 길에 눈을 크게 다쳐 집에서 쉬다가 학교에 나갈 즈음 아버지가 없는 살림에 쌀 몇 말을 주고 서천 읍내에 있는 동기동창 네 집 뒷방에 하숙을 붙여준 일이 있습니다.

그 집은 일본식 적산 가옥인데 천정이 높고 방바닥에 다다미가 깔려 있던 집으로 엄청 추었던 기억입니다. 그 집에서 함께 하숙한 친구 가운데 허근이란 이름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키는 나와 비슷하게 작은데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몸집이 다부졌고 팔뚝이 제법 굵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집 형들의 서가에 있는 『청록집』이란 책에서 베꼈다면서 시 한편을 읽어주었습니다. 「산이 날 에워싸고」란 시.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가슴이 콱 메이도록 좋았습니다.

내 마음이 바로 저 마음이야 그런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그렇게 내 마음을 쏙 빼다가 썼을까 싶도록 좋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운명적 만남이었을까요.

시인이란 참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사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시인에 대해 아스무리한 동경이 싹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고등학교는 공주사범학교. 거기서 나는 다시금 박목월이란 시인을 만납니다.

중학교 때 친구로부터 들었던 『청록집』이란 책을 우리 학교 도서실에서 찾았으나 없었습니다. 결국은 같은 집에 하숙하고 있던 공주사범대학 다니는 형에게 부탁하여 대학 도서관의 책으로 읽었습니다.

그 책은 이미 앞장과 뒷장이 떨어져 나간 헌책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 책을 소중하게 받아 공책에 베꼈습니다. 그러니까 시 수업의 첫 교과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석정 시집을 읽고 시인이 되기로 마음먹으면서 성적은 고꾸라졌고 문제 학생으로 낙인 찍혔지만 고등학교 3년은 오로지 시인이 되겠다고 맹서하면서 살아온 그런 대로 내 인생에서 의미 있는 3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시 공부를 하면서 만난 책 가운데 또 한 권은 박목월 시인의 『보라빛 素描』란 책입니다.

이 책은 박목월 시인의 초기 동시로부터 시집 『난· 기타』의 시편까지 소상하게 해설이 붙은 책입니다. 해설이 매우 섬세하고 친절하여 시의 초심자로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있었습니다. 다시금 교과서가 된 책입니다.

그럭저럭 한평생, 이 땅의 한 사람 글 쓰는 사람으로 살면서 상호간 이름을 기억하는 시인, 만나본 시인을 헤아리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많은 시인들 가운데 박목월 시인과의 만남은 나에게 그 어떤 사람과도 비할 수 없는 커다란 인연이었으며 또 감격이었으며 행운 그 자체였습니다. 박목월 시인은 내가 시단에 등단할 때 박남수 선생과 함께 <서울신문> 신춘문예 심사자였습니다.

“… 시류에 초연하여 잃어져 가는 서정의 회복을 꾀하고, 시의 본도를 지켜 침착하게 자기의 세계를 신념 하는 그의 작품이 오늘날 우리 시단의 반성적 계기가 되리라는 뜻에서 과감하게 당선작으로 밀어본다” 이것은 심사평의 끝부분입니다만 나의 작품이 신춘문예 풍으로는 적격이 아니지만 특별한 목적으로 당선을 시킨다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심사자는 나의 작품에 애정을 보여 본래 시 제목인 「소곡 풍」을 「대숲 아래서」로 고쳐서 까지 당선시켰던 것입니다.

신춘문예 당선 시와 같은 첫 시집 서문에서도 박목월 시인은 넘치는 축복을 부어주셨으며, 결혼식 주례사에서도 넘치는 말씀으로 축하해 주시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나군이 시골에서 독학을 하다시피 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는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의 하나입니다.

더구나 그가 시골의 두메산골에서 교편을 잡아가면서 그의 작품을 혼자서 연마시켜 가지고 우리 문단에 자기 혼자의 힘으로 등단해 가지고 또한 오늘날의 그 같은 어떠한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은 그 나군 자신의 충분한 노력이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그에게 있어서는 천사람 만사람 가운데 하나쯤일 수 있는 그 이상의 많은 사람 중에 하나에 하나일 수 있는 남다른 뛰어난 재질을 가졌습니다.” ― 1973년 10월 21일, 결혼식 주례사 중에서

“나군은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시를 계승하여 오늘의 것으로 빚어놓은 희귀한 시인이다. 묵은 가지에 열리는 그의 알찬 열매는 어느 것이나 오늘의 것으로서의 참신성과 신선미를 잃지 않고 있다. 그런 뜻에서 그의 작품은 누구에게나 친근감과 신선감을 베풀어주리라 확신한다.” ― 시집 『대숲 아래서』서문 중에서

이렇게 과분한 칭찬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계실 때 충분히 찾아뵙고 지도를 받으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하지 못한 미욱함이 이제 와 가슴을 치게 합니다.

그래도 박목월 시인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시인입니다. 시의 흐름으로 보아서 그렇고, 인간적 만남으로 그렇습니다.

정말로 박목월 시인은 당신 살아계실 때 많은 시인들로부터 ‘부성(父性)’을 느끼게 하는 시인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찾아가 의논드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이는 그런 인품이었습니다.

중국사람 이지(李贄)란 사람이 말한 바와 같이 진정 ‘사우(師友)’가 있다면 나에게는 박목월 시인입니다. “스승 같은 친구가 아니면 친구가 아니고, 친구 같은 스승이 아니면 스승이 아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세상에 나와 박목월 시인 같은 분을 시의 아버지로 만났던 나 같은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듭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나 느낌을 가졌던 사람은 나 말고도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같이 박목월 시인은 오래 동안 우리 시단의 큰 기둥이며 어른으로 자리했던 것입니다.

박목월(朴木月, 1916~1978) 시인의 본명은 박영종(朴泳鐘). 우리가 아는 박목월이란 이름은 필명. 이름을 지을 때 시인 변영로의 호 수주(樹州)에서 나무 목(木)을 따오고 김소월에게서 달월(月)을 빌려다 목월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경북 월성(지금의 경주) 출생으로 비교적 유복한 집에서 성장, 어려서 한학을 익혔으며 대구의 계성중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금융조합 서기로 일했으며 광복이 된 후 모교의 교사로 첫출발하여 서울의 중등학교 교사, 대학 강사를 거쳐 1962년부터는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어 세상을 뜰 때까지 봉직하였습니다.

처음 문단에 나간 것은 성인시가 아닌 동시. 중학교 3학년 때 <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과 <신가정>지에 「제비맞이」란 글을 발표하여 아동문학작가로 어느 정도 인정받았으나 1936년 가세가 기울어 고향 경주로 돌아가 동부금융조합에 입사, 근무를 했습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것은 1939년과 1940년.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길처럼」「그것은 연륜이다」「산그늘」「가을어스름」이 추천되어서입니다.

박목월 시인의 처가는 충청남도 공주. 사모님 유익순 여사는 공주영명학교 출신인데 결혼을 한 것은 1938년도, 공주제일감리교회에서였습니다.

그 시절의 기념사진이 『박목월 문학전집』에 남아 있습니다. 결혼식 당일 23세의 박목월 시인은 경주에서부터 부친을 모시고 장발을 바람에 흩날리며 택시를 타고 공주까지 와서 불두화 새하얀 꽃송이를 가슴에 달고 혼례식을 올렸다고 어떤 기록에 남겼습니다.

박목월 시인에 대한 평가는 일찍이 등단 때부터 그 범위가 확연하게 드러났다고 보아집니다. 그것은 추천위원이었던 정지용 시인의 추천사를 읽어도 그렇습니다. 좀 길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 날만 하다. 소월의 툭툭 불거지는 삭주구성조(朔州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아, 민요풍에서 시에 발전하기까지 목월의 고심이 더 크다.

소월이 천재적이요, 독창적이었던 것이 신경감각묘사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민요’에 시종하고 말았더니 목월이 요(謠)적 데생 연습에서 기까지의 콤퍼지션에는 요가 머뭇거리고 있다. 요적 수사를 충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바로 한국시이다.”

선배시인이 후배시인을 평가한 말 가운데 이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 듯합니다. 박목월 시인은 생전에 조지훈, 박두진 시인과의 『청록집』말고 『산도화』『난·기타』『청담』『경상도의 가랑잎』『무순』 등 무게 있는 시집과 『산새알 물새알』같은 동시집을 낸 바 있고 개성적인 산문집도 여러 권 낸 바 있습니다.

생전에 문학전집이나 시 전집, 시 선집도 여러 차례 나왔고 돌아간 다음 민음사 판으로 『박목월 시 전집』(2003년) 결정판이 나왔습니다.

박목월 시 가운데에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가 아주 많습니다. 시기 별로 다르고 취향별로 충분히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나는 초기 시인 「나그네」를 들어볼까 합니다.

작품 「나그네」는 시의 벗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이란 시에 화답하여 쓴 작품입니다. 일본침략기의 마지막 시기인 1942년도 이른 봄 조지훈은 암울한 시대의 어둠을 견디지 못해 경주로 박목월 찾아갑니다.

서로 문통(文通)은 있었지만 초면인 사이였에 박목월 시인은 ‘朴木月’이라 쓰여진 깃발을 들고 건천역으로 마중을 나갔다고 합니다. 그런 뒤 두 사람은 보름동안을 경주에서 함께 지내면서 이 곳 저 곳을 돌아보기도 하고 시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시「완화삼」은 본래 조지훈이 한시로 발상한 것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고 합니다. <태봉로석한산우(苔封路石寒山雨)/ 주숙강촌난숙휘(酒熟江村暖夕暉)>. 번역하면 <이끼 낀 돌길에 차거운 산비 뿌리고/ 술 익는 강마을의 따스한 저녁노을>이 됩니다.

특히 두 번째 구절인 <술 익는 강마을의 따스한 저녁노을>이 조지훈의 시 「완화삼」에 가서 ‘술 익는 강 마을의/ 저녁노을이여’로 자리를 잡고, 다시금 박목월의 「나그네」로 다시 옮겨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로 바뀌게 됩니다.

조지훈의 한시→조지훈의 「완화삼」→ 박목월의 「나그네」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그러기에 박목월 시인은 「나그네」란 작품의 부제로 조지훈의 시 구절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길지 않은 한편의 작품에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식민지 지신인 두 사람의 고뇌와 아름다운 우정이 고스란히 스며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나는 ‘육신의 아버지는 지금도 고향마을에 살고 계신 아버지이고, 시의 아버지는 박목월 선생이고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다.’라고 고백하는 영광을 갖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하고 가득한 마음입니다.

나그네/ 박목월
                                                                                                                                     술 익는 강 마을의
                                                                                                                                    저녁노을이여 ― 芝薰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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