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의 죽은 시인들 나라-3

인간관계란 참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아주 오랜 날을 가까이 살 부대끼며 살아도 별스럽게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난 일도 없고, 전화 통화조자 하지 않았지만, 평생을 두고 삶의 지침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을 통해서 만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은 책을 통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동시에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나에게 있어 그런 인간관계를 가진 시인 가운데 한분이 바로 목가시인 신석정(辛夕汀, 본명 錫正 1907~1974) 선생입니다. 공주사범학교란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은 나는 엉뚱하게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스스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되는 계기를 갖게 해준 분이 바로 신석정 시인입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공주에는 헌책방이 많았습니다. 새 책을 파는 서점도 헌책을 겸해서 팔던 시절입니다. 그런 시절 문득 만난 시집이 신석정 시인의 시집 두 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것은 횡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석정 시인의 아픈 생활의 이면사가 있었습니다. 그 때 내가 만났던 신석정 시인의 두 권 시집은 시인의 첫 시집인 『촛불』(1939, 인문평론사)과 두 번째 시집인 『슬픈 목가』(1947, 낭주문화사). 그런데 내가 구입한 책은 다같이 1956년에 초판 발행되고 1959년 재판 발행된 책으로 대문사(서울)란 이름의 출판사로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야 내막을 몰랐지만 나중에 시인의 힘겨운 날들의 여기에 숨어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왜 두 권의 시집이 같은 출판사에서 동시출간 되었을까? 그것은 시인이 자녀의 학비와 책값을 대느라고 쌀 두가마니 값에 판권을 매절(賣切)로 팔아넘겨서 그렇습니다.

그만큼 시인의 형편이 어렵고, 어려웠던 것이지요. 시대는 6·25 전쟁 이후의 시대입니다. 누구나 힘겹게 살던 궁핍한 시대였지요.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시인의 굴욕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진 것이지요.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보면 이러한 시인의 굴욕이 없었다면 시골의 어린 학생이 어찌 신석정 시인의 시집을 한꺼번에 두 권이나 손에 넣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명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권의 시집을 보자 어린 가슴은 이내 뛰었고 시인의 시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입장이라 전원풍경이 나오는 시들이 좋았습니다. 마음이 편안했고 내 이야기만 같고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를 통해서 받는 위로. 이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선 정서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깊어지면 정신적인 것, 영혼적인 것으로까지 뿌리를 내립니다. 시가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롭고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것이라면 나 자신 시인이 되겠다는 꿈은 매우 좋은 것이란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많이 망설이다가 서투른 글씨로 시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인으로부터 엽서 한 장이 돌아왔습니다. 편지는 선생 특유의 휘날리는 필체로 ‘오월의 햇볕이 유난히 화창한 나의 작은 방안에서 군의 편지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습니다.’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문인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슴이 뛰었겠습니까?

그리고서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 내가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시단에 등단한 것은 1971년도의 일이고 첫 시집을 낸 것은 1973년도의 일입니다. 물론 시집을 시인께도 드렸습니다. 시인은 또 축하말씀을 엽서로 보내주었습니다. 시인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입니다.

1974년 7월 7일 아침 일곱 시 라디오 뉴스시간에 시인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진작 한번이라도 시간과 용기를 내어 찾아뵈올 것을 후회해 보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도 섭섭한 마음에 나는 청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전일보 지면에 「마지막 난초」란 제목으로 조시 한편을 써서 기고하여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를 않고 그 뒤 교직에서 정년을 한 뒤 주례를 보아줄 일이 있어 전주에 가면서 이러집니다. 기록을 보니 그것은 2008년 11월 22일. 시인의 사후 34년 뒤. 세상이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전주시 남노송동 175번지.’ 아무리 주소를 대고 물어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전주시의 변두리 지역이었습니다.

겨우 시인이 살던 집을 찾았는데 집주인은 딴 사람이 되어 있었고 또 그 주인마저 집을 비우고 외출하여 집을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허지만 그 집의 옆집 주인이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또 집 주인에게 연락하여 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오래인 만큼 뜨락의 나무들이 밀림의 나무들처럼 자라 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뒤엉켜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 대로 시인의 삶의 풍취며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더욱 다행스런 일은 시인의 아드님이 집을 매각할 때 새 집주인에게 될수록 집의 원형을 보존하는 조건으로 매각해서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시인의 제자들이 다시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쓸 계획이란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나는 동행한 아내와 여성 시인 한 사람과 셋이서 늦은 가을날 오후를 오래 동안 시인의 뜨락에 서성여보고 마루에도 앉아보고 방안의 깊숙이까지 들여다보고 대문간에서 사진도 찍고 그러면서 시인이 살다가 떠난 자취를 가슴에 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뒤 또 시인의 고향인 부안에 가서 ‘신석정문학관’(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560번지)이 건립 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떠났지만 머물러 살던 전주나 향리 부안이 시인을 아끼는 후예들의 지극한 정성을 보았다 할 것입니다.

신석정 시인은 동시대의 문인들보다 호기롭게 산 문인이 아닙니다. 우선 시골(부안, 전주)에서만 살았고 다른 문인들처럼 문학잡지의 추천위원이나 문학상의 혜택을 일찍이 누리지도 못했고 또 책을 내는 데도 시원시원하지 못했습니다.

또 대학의 교수직을 맡지 못하고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하면서 대학 강사로 일관합니다. 6·25 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않고 고향 부안에서 지내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 피치 못할 오해가 있어 그 일로 하여 평생을 두고 힘겨워 했던 걸로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민족수난기에 지식이 당하는 수모라 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시인의 기개는 헌걸차고 시인의 시정신은 올곧고 시의 문장은 오롯하고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시인의 영향이며 업적입니다. 시인의 시집으론 앞에서 밝힌 두 권 시집과 『빙하』(1956, 정음사), 『산의 서곡』(1967,가림출판사), 『대바람 소리』(1970, 한국시인협회) 등이 있고, 『중국시집』,『명시조감상』,『매창시집』,『당시선집』등과 같은 번역시집이나 감상서적을 내기도 했으며, 『한국시인전집』제5권(1959, 신구문화사)에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수록되기도 했습니다.

시인의 사후에 나온 책은 이러합니다. 산문집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1974, 지식산업사), 유고시집 『노래하고 싶은 것은』(2009, 창작과 비평사), 『신석정 전집』(2009, 국학자료원), 시선집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1990, 창작과 비평사),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1991, 미래사),『한국현대시문학대계 11권, 신석정』(1985, 지식산업사), 범우문고 79번『촛불』(1979, 범우사) 등이 있고 받은 상으로는 전라북도문화상, 전주시문화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이 있습니다.

시인의 시 가운데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편들로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임께서 부르시면」,「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난초」,「수선화」, 「대바람 소리」 등 여러 편이 있지만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는 「작은 짐승」이란 시입니다.

전원서정의 귀감이요 노장철학이 배어 있노라 평가되는 신석정 시인의 시편. 초창기 시편에서는 어쩌면 만해 한용운이나 인도의 타고르 같은 시인의 호흡이 어른거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에 수록된 「작은 짐승」은 매우 아담하면서도 시인 특유의 평화적이면서 자연주의적인 풍모가 십분 발현된 작품입니다. 소박하지만 완벽한 시라 그럴까요. 오로지 사랑의 세계, 고요의 세상입니다. 인간끼리의 어울림이 그렇고 인간과 자연의 교감이 그렇습니다.

즐겨 자연은 인간의 배경이 되지만 자연도 인간에게 배경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어쩌면 나의 시 「돌계단」같은 작품은 시인의 이런 작품을 오래 읽고 외운 나머지 저절로 나온 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나저나 이 시 가운데 나오는 ‘란’이란 누구일까? 얼마나 이 시가 맘에 들었으면 좋아하던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의 여학생의 이름을 스스로 ‘난’이란 지어놓고 글을 쓰고 편지를 쓰고 그러했겠습니까? 참 지향 없는 일이요 부질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작품을 옮기면 이러합니다.

작은 짐승/ 신석정

란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란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안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 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란이와 나는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 빛 섬들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란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란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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