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섭 기자의 포토 플러스(+) 이야기-2

공주시 봉황동 제민천 옆에 있는 이 집 부근을 지날 때면 난 가슴이 따뜻해진다. 전에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을 내가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계속 수소문을 하고 있지만, 이민을 갔다는 소리만 들려올 뿐, 어디로 이민을 갔는지 친구들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그들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었는데 강당 앞에서 신나는 음악소리가 들려와 가보니 색소폰연주자가 드럼에 맞춰 ‘서울의 찬가’를 연주하는데 무척 듣기 좋았다.

고3 체육대회때 찍은 사진.

당시 문학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나는 고민에 빠졌다. “저것도 배워 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척 고민스러웠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당시만 해도 관악부는 규율이 엄해 선배들로부터 구타도 심할뿐더러, 대부분 관악부 학생 대부분의 학업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관악부에 입단했다. 입단하는 순간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았지만, 때는 늦었다. 문학부에서 활동하면서 선배들로부터 받았던 대접이 ‘칙사 대접’이었음을 그때서야 알았다.

내가 지금까지 맞은 매의 90%를 그때 맞았다. “무슨 이런 집단이 있나?”싶었다. 뚜렷한 명분 없이 단지 내가 ‘후배’라는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당해야만 하는 신세가 참으로 처량했다.

그렇게 당하면서 색소폰을 배웠는데 지금 어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나도 그때 관악부에 들어가서 악기나 배울 껄 그랬다”고. 행여 관악부 출신들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 그들에게 욕 얻어먹기 싫으면.

그러나 관악부 선배라고 해서 모두 후배를 힘들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졸업할 때 까지 몽둥이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도 있다. 대진주류에 근무하고 있는 유철희씨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그때도 그는 사람들을 좋아해서 선후배 사이의 관계가 좋았다. 특히 매점에 있는 형님과 친해서 빵을 공짜로 얻어먹곤 했다. 나도 따라 다니며 매점 형님과 친해져서 공짜 빵을 몇 번 얻어먹었다.

지금도 그 때 나의 기억 속에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는 만나면 가슴이 뭉클하다. 공주여고 음악교사로 재직 중인 이원복 선생님도 그중 하나다.

봉황동 제민천 옆의 집에는 나에게 색소폰을 가르쳐 주었던 나의 2년 선배와 그의 여동생이 살았다. 파란색이 약간 들어간 안경을 끼고 있던 그는 나에게 가장 많은 웃음을 보여준 선배였다.

그의 여동생은 나와 같은 학년이었는데 그 선배에게 내 또래의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3학년 때 그 선배와 통화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

그 후로는 그 집에 놀러 가서 식사도 하고, 그 여동생과 함께 놀다 오기도 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대전에 있던 내가 입영영장을 받아 공주에 내려왔을 때 갓 전역한 그 선배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후로는 보지 못했다.

저 창은 나의 발길을 늘 멈추게 하는 창이다. 내가 좋아했던 선배의 방이었기 때문이다. 전윤수, 그 선배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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