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일 ‘사랑만들기’ 팀원들과 함께 공주시 반포면에 위치한 동곡요양원에 공연을 다녀왔다. 78회 공연이었다.팀원들에게 일정을 물어보고 공연을 잡은 것이 아니라, 일정부터 잡고 팀원들을 소집했다. 그래야만 일이 될 것 같았다.겨울동안 날씨가 춥다는 핑계로, 가려고 했던 시설에 신종플루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못 갔다. 그리고 친한 분들의 청첩장을 받아 놓고 있어 미루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내 마음의 평화와 스스로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싶어서였다. 대한민국에서 평균수명이 가장 짧은 사람들의 직업이 언론인이라고 한다. 기자는 그렇게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다. 특히나 정도를 걷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큰 무대에서 하는 공연은
수마(睡魔). 기자에겐 참으로 물리치기 힘든 마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 마귀에게 이겨본 적이 없다. 어려서도 졸리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잤다. 길가에서도, 밭두렁에서도, 심지어 방앗간에서도 잤다.?심지어 졸며?운전하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깬 적도 있다.그렇게 졸음을 참지 못하는 기자가 입대하고 보니 문제가 생겼다. 내 마음대로 잠을 잘 수 없는 것. 심각했다. 나름대로의 대책이 필요했다.훈련병시절에 무박 2일 동안 산악행군을 하는데 어찌나 졸음이 쏟아지는지 점심시간 밥을 덜먹어 가며 잠을 보충했다. 그리고 평지에선 철모를 눌러쓰고 졸면서 갔다.자대배치를 받고 나니 고참이 “야전상의를 내 놓으라”고 하더니 내피를 뜯어냈다. 그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됐는데 소위 ‘다림 빨’을 위해서였다. 내피가
기자는 대학 3학년을 마치고 휴학했다. 군 입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장이 나오지 않아 공군에도 지원했다. 그리고 육군 기술병에 지원하기 위해 운전면허도 취득했다. 그러던 중 6월 25일자 입대 영장을 받았고, 전역하지 얼마 되지 않은 선배를 만났다.선배와 차를 한잔 하면서 “춘천으로 집결통보를 받았다”라고 말하니 “너는 이제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쪽은 1군사령부 예하지역인데 최후방이 원주이고 양구, 인제, 원통 등 전방부대로 배치돼 철책선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전방경계훈련의 악몽(?)이 떠올랐다.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질 않자 1학년 때는 훈련소에 입소교육을 시켰다.그리고 2학년 때는 전방부대에 배치시켜 현역병과 함께 근무를 시켰다.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바른 말(남이 봤을 때), 쓴 소리(당사자)를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대가는 어떨까?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경험상으로 볼 때 결코 그런 일은 없다.오히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한다. 바른 말을 사람은 권력을 가진 자신에게?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또 정작 ‘쓴 소리’를 ‘바른 소리’로 정당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쓴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기자가 고3때였던 1982년. 관악부에서는 오후 수업을 빼고 충남 관악 콩클 대비 연습에 들어갔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가서 따졌다.“우리는 대학진학에 뜻을 두어서 인문계로 진학했는데, 오후 수업을 다 빼고 연습만 하면 우리는 어떻게 대학에
70년대 초 나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유치원에 다녔다. 당시 사립유치원에 다닌 셈인데 유치원에 다니면서 별도의 비용을 냈던 기억은 없다. 복 받은 인생이다.당시에는 왜 그리도 코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찔찔 흘린 코를 소매로 슥 닦지 말고, 손수건으로 닦으라고 손수건을 옷핀에 꽂아 매일 웃옷에 달아주는 것이 당시 어머니들의 일과였다.당시 중장유치원은 지금의 중장초등학교 아래에 있었다. 이곳에는 장난감도 많았지만, 정작 우리가 가지고 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당시 방안에는 장난감 자동차가 있었는데 올라타고 발로 구르면 앞으로 가고, 핸들도 조작할 수 있었다. 정말 그 장난감 자동차를 타보고 싶었는데 끝내 타보지 못했다.당시의 나의 유치원 담임선생님은 대표자의 딸인 이미자 선생님이었다. 당시
길을 가다가 만난 이용원.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이발소’라는 말이 더 친숙한 곳이다. 난 허수룩해 보이는 이발소가 더욱 편하게 느껴진다.생각해 보면 옛날의 이발소엔 정겨움이 있었다. 면도날을 갈기 위한 가죽 벨트와 가죽 벨트와 함께 붙은 광목천이 있었다. 이발사 아저씨는 면도칼을 그것들을 이용해서 갈고는 했으며, 간혹 잘못하면 면도날을 갈기 위한 가죽이 면도칼에 베이기도 했다.그리고 세숫비누와 빨래비누를 반씩 쪼개 넣어 거품을 만들어 내는 도구로 쓰이는 플라스틱 통이 있었고, 이발사는 양쪽을 번갈아가며 솔질을 해서 거품을 만들어 냈다.또한 겨울이면 연탄난로를 피워 다목적으로 이용했다. 더운 물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철사로 연통과 연결해 수건을 말리는데 사용했으며, 손님들이 차갑게 느껴지
계룡저수지. 그곳은 어릴 적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축구를 하다가 더우면 들어가 수영을 즐겼다.지금은 낚시꾼도 별로 없지만, 1970년대만 해도 물고기도 많았고, 낚시꾼도 많았다. 봄장마 때면 물이 저수지 부근의 논에 까지 가득 찼으며, 밤에는 잉어를 잡느라 쇠스랑이나, 포크, 톱을 든 사람들이 논을 헤매는 진풍경도 벌어졌다.이런 주민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잉어는 주민을 피해 자기들을 잡기 위해 진치고 있는 사람을 피해 논 저쪽에서 펄쩍 뛰어 올라 밤늦도록 집에 못 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어린 우리들은 횃불에 족대를 들고 붕어를 잡느라 신나게 뛰어다녔다.가뭄으로 물이 빠지면 저수지 중간정도에 있는 대추나무가 보이기도 했으며, 동네 청년들은 그곳까지 수영으로 다녀오기도 했다.나의 집
공주시 봉황동 제민천 옆에 있는 이 집 부근을 지날 때면 난 가슴이 따뜻해진다. 전에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을 내가 알고 있는 까닭이다.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계속 수소문을 하고 있지만, 이민을 갔다는 소리만 들려올 뿐, 어디로 이민을 갔는지 친구들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그들은.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었는데 강당 앞에서 신나는 음악소리가 들려와 가보니 색소폰연주자가 드럼에 맞춰 ‘서울의 찬가’를 연주하는데 무척 듣기 좋았다. 당시 문학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나는 고민에
그때는 그랬다. 기자가 어렸을 때는. 야외에서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는 가설극장이 있었다. 기자가 살았던 곳에서는 중장리 오미방앗간 옆 공터에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했다.장소가 결정되면 가설극장을 운영하는 팀원들은 마을 곳곳에 포스터를 붙이고, 초대권을 주고, 차를 타고 다니며 방송을 통해 가설극장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렸다.그 때 봤던 영화가운데 기억에 남는 영화는 ‘의사 안중근’ 이었는데 도로 양옆에 남자와 여자가 권총을 서로 던져가며 사격전을 벌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그리고 무협영화도 기억난다. 주인공인 여자 무사는 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