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건국초기부터 원로원이 존재했다. 왕정시대는 씨족의 장로가 구성원이었고, 공화정 시기에는 의원제도 운영했다. 정원이 3백명에서 9백명에 이르렀고, 임기는 종신이였다. ?처음에는 귀족만으로 구성됐으나 나중에는 평민도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원로원의 역할은 입법. 행정은 물론 국정운영의 실질적인 중심기관으로, 원로원의 결의는 법률 그 자체였었다. 말하자면 그 시대의 권력과 권위. 명예의 상징 이였던 것이다. ?지금도 공화국제도를 실시하는 나라에서는 상원을 원로원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대로마의 노회한 정치세력으로 불리웠던 원로가 이제는 어떤 분야에서건 경험과 공로를 많이 쌓은 사람을 일컫게 됐다. ?일본은 국가에 공로가 많은 각료 출신을 원로대신(元老大臣)으로 칭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지난 5일 울산시청 상황실에서는 이름도 긴, '울산 투명사회 협약 체결을 위한 대표자 간담회' 가 있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전문. 총7장(37조). 부칙으로 구성된 울산투명사회 협약(안)이 추인됐다. 투명사회협약이란 정계. 경제계. 교육계. 중앙 또는 지방정부. 시민사회단체대표가 공동으로 체결하는 일종의 반부패 청렴 대책 추진 운동이다. 울산은 광역시장이 공공부문의 대표를 맡고 정치분야는 시의회 의장이 선도역에 나서게 된다. 교육부문과 경제부문은 교육감과 상의회장이 각각 대표자가 되고, 지역 시민단체 및 여성단체협의회 회장등은 시민사회 부문의 책임 역할을 하게 된다. 공공부문은 주로공직사회의 부패방지 체제강화와 제도 개선. 공직자 윤리 강화등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정치부문은 지방
우리 인간에게는 귀耳가 2개, 입口이 1개 있다. 우주만물을 창조한 조물주의 섭리 중에서 귀와 입의 개수만큼 신기한 것은 없다. 조물주는 어떤 이유에서 인간의 귀를 2개, 입을 1개만 만들었을까? 만약 그 반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져보지만, 정답 찾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다만, 조물주께서는 ‘남의 말은 가급적 많이 듣고, 자신의 말은 최대한 적게 하라!’는 뜻에서 2개의 귀와 1개의 입을 만든 게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 '성경'을 보면, 갈릴리 호수와 사해死海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갈릴리 호수는 그곳으로 유입流入되는 강물과 그곳에서 흘러나가는 강물이 공존하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뛰어노는 생명의 젖줄이 될 수 있었다. 반면,
금시발복지(今時發福地), 효심이 천심을 감동시켰다. 인장묘발(寅葬卯發) 인시(人時)에 장사(葬事) 하고 묘시(卯時)에 발복(發福)한다.새벽 서너 시에 묘를 쓰고 대여섯 시경에 발복한다. 발복 시기가 속히 온다는 이야기다. 어느 날 숙종(肅宗) 임금이 평복을 입고 민심(民心)을 살피려고 밀행(密行)을 다니는데 가난하게 생긴 한 부부가 슬프게 울면서 냇가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장사(葬事) 지내려는 것을 보았다.풍수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임금이 깜짝 놀라 가까이 가보니 광중(壙中)에는 어느새 물이 가득 차 있었다.가난한 부부는 물이 차 오른 광중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더욱 슬프게 울고만 있었다. 숙종 임금은 아무리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이라고는 하지만 묘를 쓰려면 산에 써야지 어찌 냇가에 쓰는지 의아하고 기가
사랑에 대한 정의는, 정의를 내리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인 신영복 선생이 사랑에 대해 내린 정의가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더욱이 감옥이라는 극도의 폐쇄공간에서 절망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관장하는 ‘사랑’에 대한 성찰省察이기에, 그 맛은 마치 한겨울 밤에 먹는 동치미 국물과 같다.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한번도 보지 않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까닭도 바로 사랑은 생활을 통하여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부모를, 또 형제를 선택해서 출생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랑도 그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
한 해가 저물고 있다. 거리에 등장한 자선남비와 언론사의 이웃돕기 캠페인 광고가 이를 실감나게 하고 있다. 흔히 ‘기부문화’를 한 나라의 ‘시민의식’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삼는다. ‘기부와 나눔’은 납세의무나 개인의 경제적 이익추구 차원이 아니라 자발적 행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닌 시간과 물질(그 많고 적음을 떠나)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문화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불어 진정한 ‘사회통합’은 계층과 계층간의 장역을 허무는, ‘기부문화’가 정착될 때 비로써 가능해지게 된다. 최근 우리의 ‘기부문화’도 경제 성장 속도만큼이나 확산.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기부행위 자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대와 계층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德之家 必有餘慶) 전의 이씨(全義李氏) 시조 묘 이야기충청남도 공주시 공주대교(公州大橋) 북쪽 금강을 바라보고 있는 곳 (홍수통제소옆) 전의이씨선산(全義李氏先山)이라고 푯말이 있는 묘가 있다.천장지비(天藏地秘)한 명당으로 전의 이씨를 명문으로 만들게 한 묘로 유명하다. 여기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공주강(금강)변에 가난한 뱃사공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친절하게 손님을 모셨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뱃삯을 받지 않고 건네주어 자비롭다는 소문이 나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주 부근의 가난한 거지들을 잘 보살펴주어 존경을 받았고 아버지처럼 따랐다. 어느 날 떠돌이 중이 와서는 급히 강을 건너자고 했다. 사공은 급한 볼일이 있나 싶어 급히 강을 건너 주었다. 그런데 스님은 배에서 내리자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인仁을 이룬다.’는 의미로서, 이는 인仁이 정신수양의 시작인 동시에 끝임을 시사한다. 공자는 “군자가 진실로 어짐仁에 뜻을 둔다면,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공자는 어떤 사람에게도 “그가 바로 우리들이 찾는 인자仁者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르쳤던 뛰어난 제자들, 이를테면 자로, 염구, 공서화와 같은 사람에게도 인자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자가 그렇게 한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서(恕)와 충서(忠恕)에 얽힌 비밀공자는 제자 번지樊遲가 인仁에 대해 물었을 때, “인자는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한다. 또 인仁은 동정심을 모태로 한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동정심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서恕’와 ‘충
? ???????????????????????????????????? 친부(親父)를 찾아준 지관 풍수지리학의 정의(風水地理學定義)풍수지리학이란 하늘과 땅의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여 인간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학문이다.또한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 국토 이용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자연과 조화된 균형 있는 개발로 인간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는 학문이다.?풍수지리의 원리(風水地理原理)풍수지리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초로 정리된 학문이다. 산과 물, 방위 등의 자연현상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인간생활에 영향을 끼쳐 왔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자연과 더불어 살아오면서 얻은 자연 이치를 정리했으니, 이것이 바로 풍수지리다. 따라서 풍수지리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이라 할 수 있다. 풍수
언제인가 시골 부모님 댁에서 열심히 거미줄을 치고 있는 거미를 신기롭게 바라본 적이 있다. 처마 밑의 돌기 부분과 TV 안테나선 사이로 몇 번의 번지점프를 하면서 마치 자전거의 바퀴살과 같은 모양으로 기본 골격을 만든 다음, 그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동심원 모양의 거미줄을 치는 것이었다. 그 거미줄의 이름이 ‘포획사’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 또 우연한 기회에 거미가 거미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거미줄 위로 순찰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목격했다. 그것은 거미가 다니는 통로 자전거 바퀴살 모양의 거미줄 위로만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 또한 나중에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미줄이 끈적끈적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계룡지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위로는 계룡산의 연천봉, 삼불봉이 마을을 자신의 품에 안고 있는 마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마을이 바로 계룡면 하대리이다. 북쪽은 중장리, 동쪽은 양화리, 남쪽은 금대리, 서쪽은 월암리에 접해 있는 이 마을은 백제 때는 웅천에, 신라 때는 웅주에, 고려 때는 공주목에, 조선시대엔 공주군에 속했다. 조선시대 말엽엔 공주군 익구곡면의 지역으로 대장 아래쪽에 위치하며 대장 또는 하대장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우산리, 신대리, 신구리, 구암리, 벽계리. 상현리, 중현리, 하현리, 옥동, 석계리, 점촌을 병합하여 하대리라 하고 계룡면에 편입됐다. 71가구 130명이 살고 있는 이곳의 주민들은 거의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 마을 전임 이장인 김석기